bound4

1화

bound4 2024. 12. 1. 23:10

18세기 영국. 작은 시골마을로 이사온지 어느덧 10년.
 
무릎을 접질렸다.
그럴 수 있지. 시간만 지나면 되니까.

「이브, 무릎에 뭘 차고 있는 거야? 괜찮니?」
 
왼쪽 무릎에 조잡한 나무 깁스를 두르고 현관문을 힘겹게 연 나를 본 언니가 호들갑을 떨어댔다.
 
「그냥 조금 아프긴 한데, 별건 아닐 거야」
「너 또 그 애랑 논 건 아니지?, 그 양아치같이 생긴 회색 머리 애. 그 애가 요즘 너랑 많이 붙어있는 것 같다?」
 
나보다 8살이나 나이 많은 언니, 자칭 ‘인생 선배’는 오늘도 나에게 데일리 훈수를 두려고 한다.
 
「그 애 때문은 아니야! 그냥 같이 거닐다가 내가 돌을 잘못 밟은 거야.」
「어찌되었든 같이 논 건 맞네? 봐봐, 네가 아무리 그에게 콩깍지가 쓰였다 해도 그 애가 이상하다는 사실은 변함없다고.」
「아 참! 언니는 왜 자꾸 걔에게 집착하는 거야! 나 걔 안 좋아해! 그리고 나쁜 애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계속되는 언니의 짜증 나는 훈수를 뒤로하고 계단을 올라 내 방으로 재빨리 걸어갔다.
아야, 발이 몹시 아프네. 하여간 넬스, 내가 오늘도 너 때문에 고생한다.
답답해진 방안을 나와 초원을 거닐었다.
 
「이브!!!」
 
익숙한 목소리가 담장 너머에서 가까워진다.
 
「이브, 미안해. 발은 좀 괜찮아.?」
「걷기가 힘들어. 당분간 멀리 나가는 건 어려울 것 같아.」
「정말 미안해. 나는 네가 그렇게 세게 다칠 줄 몰랐어. 그냥 나는 너를 놀래주려고 했을 뿐이야….」
 
나에게 사과를 하는 넬스의 촉촉한 눈을 보니 짜증 났던 마음이 조금은 풀어졌다. 넬스는 오늘 회색 머리카락 색과 대비되는 분홍색 옷을 입었다. 안 어울릴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에게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괜찮아. 이미 지난 일인데 뭘. 조금만 불편하게 살면 되지. 그 대신 그동안 네가 내 심부름 좀 도와줘야겠다.」
「어어! 꼭 그럴게, 시키기만 해줘.」
 
넬스가 격한 목소리로 나에게 사과를 할 때 뒤에서 또 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처를 보니깐 한 달은 힘들게 살아야 할 것 같네.」
「뭐? 누구야, 한 달이라고??」
 
갑자기 들린 목소리의 당사자를 본 넬스는 약간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한 달이나 지속하게? 설마.」
「이 정도 상처는 푹 쉬고 잘 쉬어야 한 달이야. 그리고 네가 이브를 이렇게 계속 건드리면 지속할 거야.」
「뭐라고? 너 지금 굉장히 무례한 건 알아?」
「다시 말할게, 이브를 가만 내버려 둬. 너 때문에 힘들어하잖아.」
「얘들아, 나는 괜찮아. 아픈채로 한 달 있어도 돼, 그니깐 서로 안 싸워도 될 것 같아!」

갑자기 극단으로 치닫는 분위기를 빨리 해소하려고 억지웃음을 내보이며 나는 말했다.

「봐봐, 이브도 괜찮다잖아, 제삼자는 가던 길마저 가라고.」
「나는 지금 이브를 만나려 하는 길이었어. 그녀에게 할 말이 있거든. 그니깐 조금 자리를 비켜줄래? 아무 사람이나 들으면 안 되는 사실이라서.」
「넬스, 난 괜찮아. 잠시 글랜과 대화할게, 그니깐 잠시 다른 곳에 먼저 가 있을래?」
「글랜…. 이름이 글랜이라고? 그래 글랜, 이브와 무슨 대화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는 꼭 말해두지. 이브는 이미 임자가 있어.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가 그런 얘기를 하려고 이브를 찾아온 건 아니지만, 만약 임자가 있다 해도 난 상관 안 해. 나는 썩 괜찮은 사람이거든」
「하. 모르겠다. 이브, 나 먼저 가본다. 걔가 너에게 무슨 짓이라도 하면 나에게 말해.」
「아, 알았어! 먼저 가봐 넬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넬스는 화를 참으며 저쪽으로 걸어갔다. 기분이 나빠도 할 건 해주는 넬스에게 약간은 고마운 감정이 들었다.
 
「자, 글랜 오랜만이야. 나에게 해줄 말이 뭐였는데?」
 
미국에서 온 금발머리 글랜은 매일 검정 계열 옷을 입는다. 오늘은 검정 코트에 검정 바지, 검정 양말, 검정 신발(..)
 
「저…. 저기 그게 말이야... 내가 요 근처에서 조금 멋진 장소를 발견했는데…. 혼자 가보기는 조금 무서워서.. 혹시 같이 가주면 좋을 것 같기도 해서…. 아, 물론 싫으면 같이 안 가줘도 돼! 근데 거기 가보면 후회하지는 않을 수도 있어! 그…. 거기가 조금 오래된 곳인 것 같거든, 이끼가 많이 덮은 유적지 같은데, 입구가 어둡지만, 랜턴을 가지고 가면 좀 보일 거야」

아까 넬스와 신경전을 벌일 때 진지하고 비범하던 얼굴은 어디 가고 글랜은 갑자기 쑥스러워하며 얌전하게 나에게 말을 건넸다.

「유적지라니, 10년 넘게 이 동네에서 산 나도 모르는 곳을 네가 어떻게 알아?」
「음. 사실 그곳으로 가는 길이 길 같지가 않거든. 오로지 만들어진 길만 걷는 어른들은 생각지도 못한 곳이지. 사실 나도 어떤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발견한 장소지만 말이야, 헤헤」
 
글랜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내일 아침 자칭 인생 선배인 언니 몰래 글랜과 그곳에 한번 가보기로 했다. 여름방학이기도 하고, 집에만 있는 것도 따분하니깐.
스르륵,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저 멀리 눈에 띄는 하양 원피스를 입고 어딘가를 응시하며 가만히 서 있는 여자애가 보인다. 새하얀 피부와 하양 머리. 밤에도 그 애는 정말 잘 보인다. 밤이 깊어지는데 괜찮으려나? 위험하지 않을까?
다가오는 나를 의식한 신비롭고 이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 애는 느릴 것 같지만 빠른 걸음으로 숲속에 사라졌다.
갑자기 뒤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그 애는」
「꺄아악!」
「나야, 넬스. 놀라지 말라고. 발목은 좀 괜찮아?」
「지금은 조금 괜찮아진 것 같아. 너도 그 애를 봤어? 갑자기 숲속으로 들어간 애.」
「방금 봤지. 그 애는 괜찮으려나? 우리 마을이 범죄율이 아무리 낮다 해도, 야생동물이 많다는 것 정도는 누구나 아는 사실일 텐데」
 
마을에 이사 온 지 4년이 다 돼가는 넬스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이브, 같이 그 애가 들어간 숲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은 어때?」
「안돼, 언니가 걱정할 거야. 무릎도 다쳤는데 어디를 가!」
「어..그렇네..그래, 그러면 나 혼자 가볼게.」
 
넬스가 혼자 숲속으로 간다고? 그 애라면 분명히 사고를 칠 게 뻔해. 할 수 없지. 내가 옆에 가줘야겠는걸.
 
「야 넬스, 나도 그냥 동행할게. 너 혼자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안가 줘도 되는데…. 뭐 네가 그러고 싶다면 같이 가자」
 
넬스는 덤덤한 어조로 수긍했지만, 그가 내심 좋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새하얀 피부에 하얀 원피스를 입었던  소녀의 발자국이 숲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발자국이 다다른 곳은 웅장한 유적지의 입구였다!
 
「글랜이 말한 유적지가 여기였구나! 이렇게 숲 깊숙이 있다니.」
「뭐야 글랜, 이 녀석. 혼자 음침하게 이런 곳은 어떻게 아는 거야.」

글랜과의 첫 만남이 좋지 않았던 넬슨은 기분 나쁘다는 듯이 말했다.

「야 이브, 내가 없을 때 글랜이 너에게 무슨 말을 했어?」
「그냥, 유적지가 있다고 했어.」
「진짜지? 다른 말은 안 했고?」
「무슨 말?」
「있잖아. 뭐 좋아한다던가 그런 거.」
「에이, 그런 말은 안 했어!」
「그럼 다행이네. 네 임자는 이미 나라고.」
「뭐? 맘대로 내 임자를 정하지 마!」
 
넬스가 자꾸 나에게 이런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렇게 친절하더니…. 점점 나에게 불편할 정도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뭐, 나도 그리 넬스가 나쁘지는 않지만.
 
「흥, 이브, 언젠가는 내가 얼마나 멋진 놈인지 네가 알게 될 거야, 늦지 않게 깨닫도록 해」
 
「너희 누구야?」
 
갑자기 들린 신비로운 목소리는 우리 뒤에서 들렸다.
 
「어떻게 이곳을 찾아온 거야? 이곳은 내가 사는 곳인데….」
 
뒤를 돌아보니 새하얀 존재가 서 있었다. 달빛을 받으니 더욱 신비로워 보였다.
조심스래 말을 걸어보았다.

「아..안녕? 우리는 네가 위험할 것 같아서 와본 이 동네 사람이야…! 내 옆은 넬스.」
「여기서 산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넬스가 투덜대는 소리를 내며 대꾸했다. 나는 넬스를 옆구리로 툭툭 치며 귓속말했다
 
「아니 넬슨, 처음 보는 사람에겐 좀 예의를 차려!」
「앗...미..미안. 」
「안녕? 난 넬슨이야. 넬슨 브랜스. 너의 이름은 뭐니?」

넬슨은 자연스럽지 못한 미소를 지으며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나...나의 이름은..」

요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소녀가 입을 뗐다.